경기도수원특례시
수원시, 구체적 자료 부족하거나 후손 없는 독립운동 인물 찾아 포상 신청
AI 요약수원시는 김노적, 이현경 등 독립운동가 7명에 대한 포상을 국가보훈부에 신청했다. 이들은 후손이 없거나 증거자료 부족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김노적은 3.1 만세운동 당시 수원 지역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현경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며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 활동을 펼쳤다. 수원시는 향토사 자료, 재일 조선인 관계 자료 등을 통해 이들의 공적을 입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광복 80주년인 2025년을 맞아 추가 포상 신청을 통해 수원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자 한다.

수원지역의 뜨거웠던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 ‘김노적’과 국내외 항일 활동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는 ‘이현경’은 아직 국가의 포상을 받지 못한 대표적인 수원의 항일 인물이다. 수원시 박물관사업소는 최근 김노적과 이현경을 포함해 총 7명의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을 국가보훈부에 신청했다. 후손이 없거나 증거자료가 부족해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그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구체적 자료가 부족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의 대표적인 수원의 독립 인물로는 김노적과 이현경이 있다.
김노적(1895.~1963.)은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 운동을 수원에서도 일으키기로 했고, 김세환은 김노적을 만세운동 인원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후로도 김노적은 기차로 통학하던 수원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원학생친목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교직을 그만둔 뒤 중국으로 떠났다가 1945년 해방 뒤 귀국해 10여년간 투병생활 끝에 1963년 사망했다. 수원시는 향토사 자료 등을 추가해 올해 김노적에 대한 포상을 신청했다.
이현경(1899.~미상)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의 언니이다. 1899년 4월 수원면 산루리에서 이학구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수원사립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만세운동 2주기이던 1921년 3월1일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140여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쳐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됐다. 귀국 후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근우회 활동에 주력했다. 이후 일제 탄압을 피해 남편 안광천과 중국으로 망명, 1930년대 초까지 김원봉과 함께 북경에서 활동한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이후 행적은 물론 생사 조차 확인되지 않아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수원시는 이현경의 항일 행적을 밝힐 수 있는 재일 조선인 관계 자료 등을 근거로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수원시가 광복 80주년인 2025년 추가로 포상을 신청한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독립 및 민족 운동을 하다 체포되고 그로 인한 판결문이 남아 있어 공적 확인의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문용배(1916.~미상), 윤경의(1893.~미상), 임학수(1923.~미상), 정재억(1910.~미상), 최병두(1925.~미상) 등 5명이다.
수원시는 수원 출신 또는 수원에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한 인물을 발굴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금까지 수원시의 지원으로 포상된 독립운동가는 13명에 달한다. 수원시가 후손을 대신해 포상을 신청함으로써 사라질 뻔했던 13명의 수원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기록에 남게 된 셈이다.
구체적 자료가 부족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의 대표적인 수원의 독립 인물로는 김노적과 이현경이 있다.
김노적(1895.~1963.)은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 운동을 수원에서도 일으키기로 했고, 김세환은 김노적을 만세운동 인원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후로도 김노적은 기차로 통학하던 수원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원학생친목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교직을 그만둔 뒤 중국으로 떠났다가 1945년 해방 뒤 귀국해 10여년간 투병생활 끝에 1963년 사망했다. 수원시는 향토사 자료 등을 추가해 올해 김노적에 대한 포상을 신청했다.
이현경(1899.~미상)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의 언니이다. 1899년 4월 수원면 산루리에서 이학구의 장녀로 태어난 그는 수원사립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만세운동 2주기이던 1921년 3월1일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140여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쳐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됐다. 귀국 후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근우회 활동에 주력했다. 이후 일제 탄압을 피해 남편 안광천과 중국으로 망명, 1930년대 초까지 김원봉과 함께 북경에서 활동한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이후 행적은 물론 생사 조차 확인되지 않아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수원시는 이현경의 항일 행적을 밝힐 수 있는 재일 조선인 관계 자료 등을 근거로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수원시가 광복 80주년인 2025년 추가로 포상을 신청한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독립 및 민족 운동을 하다 체포되고 그로 인한 판결문이 남아 있어 공적 확인의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문용배(1916.~미상), 윤경의(1893.~미상), 임학수(1923.~미상), 정재억(1910.~미상), 최병두(1925.~미상) 등 5명이다.
수원시는 수원 출신 또는 수원에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한 인물을 발굴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금까지 수원시의 지원으로 포상된 독립운동가는 13명에 달한다. 수원시가 후손을 대신해 포상을 신청함으로써 사라질 뻔했던 13명의 수원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기록에 남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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